김재남(53세) 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김 씨를 서슴없이 ‘여장부’라고 부른다. 워낙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추진력이 강한데다 외모에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김 씨를 깊이 아는 사람은 김 씨가 그 누구보다도 여리고 세심한 마음씀씀이를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장에 물건을 팔러온 할머니만 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그녀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이곳에 정착할 줄이야…

친정집은 하동, 시집은 화계, 어쩌면 그런 김 씨가 광양시에서 자리를 잡은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 씨에게 광양은 ‘잠시 머물러 있다 갈 곳’이었다.

하동에서 나고 자랐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오빠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을 돕기위해 부산으로 가게돼 김 씨에게 부산은 친정인 하동보다도 친근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소개로 부산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던 남편 이병주(62세) 씨를 만나게 됐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부산아낙네가 될 줄 알았다.

“부산에서 오빠를 도와 일을 하던중에 남편을 소개받았어요. 첫눈에 이사람이다 싶었죠. 남편도 직장이 부산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결혼을 하면 부산에서 자리를 잡을꺼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결혼을 얼마 앞두고 갑자기 시동생이 세상을 떠나게 됐죠. 남편은 그때의 충격으로 건강이 안좋아졌어요. 그렇다고 결혼을 미룰수는 없어 조촐하게 치루고 바로 이곳으로 왔죠. 남편의 건강이 도시의 안좋은 환경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근처에 친정과 시댁이 있으니 완전한 객지도 아니고요.”

남편이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던 터라 둘은 직장을 잡지 않았다. 그대신 땅을 조금 얻어 농사를 지어보기로 했다.

“특별히 몸에 병이 있는 것도 아니니 좋은 공기 마시고 땅을 밟으며 일을 하다보면 금방 건강이 좋아질 줄 알았어요. 길어도 3년일줄 알았죠.”

하지만 그들의 계획과는 달리 광양은 이제 그들에게 제2의 고향이 되버렸다. 공기좋고 사람좋은 이곳을 이제는 떠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쉽지만은 않았던 적응

“연고지는 이곳이라해도 둘다 부산에서 왔으니 이곳 외지인도 그냥 외지인이 아니었죠. 처음 적응하는 과정이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처음 김 씨 부부가 이곳에 왔을 때 주변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모두 도시로 나가려고하던 그 시절 거꾸로 시골로 돌아온 젊은 부부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던 것이었다.

“지금이야 귀농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그 당시는 아니었어요. 농사밖에 모르는 사람들도 자식들만은 도시로 내보내려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도시에 살던 젊은 부부가 거기다 부산에 살던 젊은 부부가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겠다고 하니 미쳤다고 하는 사람에 간첩아니냐고 수근대는 사람들까지 있었죠.”

농담이 아니었다. 농사의 ‘농’자도 몰랐던 김 씨 부부는 농사일에 치여 마실갈 틈조차 없었고 그런 폐쇄적인 생활을 이해못한 마을 사람들은 간첩인 것 같다고 둘을 신고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주변의 도움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고추농사를 시작하고 몇 년을 고생했는지 몰라요. 계속 실패를 거듭했죠. 어디다 물어볼 곳도 없고 보고배운것도 없으니 매번 겪어본 후 경험으로 터득해야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저희 집이 마을 제일 꼭대기에 있어서 일부러 내려오지 않으면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든데다 살림도 서툴고 농사일도 서툴다보니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더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죠.”

늘어가는 살림솜씨

김 씨가 직접 담근 매실장아찌와 각종 장류는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 씨에 거실은 김 씨가 직접 담근 각종 술로 장식이 돼있다. 매실주와 죽순주,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술까지…
그런 김 씨에게도 살림초보시절이 있었다.

“처음 결혼하고는 밥도 할 줄 모르는 초보새댁이었어요. 지금은 집안일 하나 안하는 ‘간큰남자’가 됐지만 그때만해도 저보다 집안일을 더 잘했어요. 오히려 저보다 남편이 요리도 잘하고 살림도 잘해 처음에는 남편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전 제가 살림에 소질이 없는줄 알았었어요.”

지금도 밖에서는 손을 꼭 잡고 다닐 정도로 금술 좋기로 유명한 김 씨 부부는 주변사람들이 ‘조류협회회장부부’라고 놀릴정도로 닭살부부다. 그런 부부인데 신혼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김 씨는 남편은 살림 못하는 아내를 타박하기보다는 자신이 나서서 집안일을 해냈다.

처음에는 남편이 해준 음식을 먹던 김 씨는 이제는 자신도 음식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도움으로 수제비를 끓이게 된 김 씨. 늘 자신은 요리도 못하고 살림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본인이 끓이면서도 그렇게 믿음을 갖질 못했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끓인 수제비를 먹어보자 김 씨에게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맛있더라고요. 수제비가 그리 대단한 요리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저에게는 그 어떤 요리를 했을때보다 뿌듯했어요. 요리에 자신이 붙으면서 살림에도 재미가 느껴졌죠.”

한번 해본 요리는 비슷하게나마 흉내를 낼 수가 있었다. 요리뿐 만이 아니었다. 바느질이며 청소며 사람들은 김 씨가 하는 일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스스로도 자부해요. 살림에 소질이 있다고요. 살림에 자신이 생기니 나도 모르게 모든 일에 자신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됐죠.”

세상밖으로

사실 지금의 김 씨를 봤을때는 집에만 있었다는 말이 오히려 믿기 어려울 정도다.

“감투가 너무 많아요. 광양시생활개선회장, 매화축제 실무추진 위원, 다압면 바르게살기 여성위원장, 범죄예방 의원까지… 젊은 시절에는 어떻게 집에만 있었을까 싶을 정도죠.”

세상밖으로 나온 김 씨는 농업기술센터를 알게됐고 그 덕분에 생활개선회를 알게됐다.

“그 전에는 그저 눈물 많고 마음 여린 새댁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생활개선회를 알고부터 씩씩한 여장부가 됐죠. 변한 것은 성격뿐만이 아니예요. 제 삶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죠. 젊은 시절에도 없었던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김 씨는 생활개선회를 통해 컴퓨터를 배우게 된 것이 두고두고 감사하다고 한다. 처음 배우는 것은 어려웠지만 컴퓨터를 배우게 되고 새롭게 알게된 세상이 김 씨는 너무도 신기하기만 하다.

“메일을 통해 농업기술센터와의 거리도 가까워지고 각종 소식을 집안에 앉아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잖아요. 생활개선회가 아니었다면 컴퓨터를 배우기가 쉽지는 않았을 꺼예요. 컴퓨터를 배운 덕에 제가 하고 싶은 일도 생기고 그 일을 계획할 수도 있게됐으니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있겠어요.”

현재 김 씨는 홈페이지를 제작중에 있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통해 올해 가을쯤에는 김 씨가 만든 매실장아찌와 장들을 전국의 소비자들에게 선을 보일 계획이다.

생활개선회활동과 각종 사회활동만으로도 사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바쁘지만 그래도 김 씨는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면 신이 난다고 한다.

“아무리 농사일에 힘들고 바빠도 아침에 눈을 뜨면 콧노래부터 불러요. 항상 행복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거든요. 항상 날 사랑해주는 남편과 가족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해야할 일이 있는데 왜 즐겁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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