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심 (48세)씨의 첫인상은 선한 눈매와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입이 조화를 이뤄 보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얼굴이었다. 영화배우같이 예쁜 이목구비는 아니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보면 볼 수록 참 예쁘다란 생각이 드는 사람이었다. 본인도 가끔 예쁘다란 소리를 들으면 내가 어디가 예쁠까 의아하다고 한다.

보는 사람이 불편할까봐 아무리 싫어도 싫은 내색 한번, 아무리 힘들어도 찡그리는 얼굴 한번 남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는 최 씨. 그 마음이 얼굴에 전해진 듯 하다.


일찍 철든 아이

최 씨의 가족은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부모님 사랑아래 7남매가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갔다.
최 씨의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어려운 내색 한번 한 적이 없었지만 최 씨는 그런 부모님이 더욱 안쓰럽기만 했다.
“너무 어렸을때부터 철이 들었던 모양이예요. 부모님들이 유난히 건강이 안좋으셨는데도 7남매들 모두 공부 가르치고 어려움 없이 살게 하려고 애쓰셨죠.”

그러던 어느 날, 최 씨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였다. 항상 몸이 약하셨던 아버지가 급기야 쓰러지면서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가장이 쓰러진 집에 7남매는 짐일 터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희생을 하면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이 편안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먼저 선생님께 도저히 지금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아니니 포기하겠다고 말씀드리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죠. 부모님은 너무도 마음 아파하셨지만 학교에 들어가야할 막내 동생을 생각하면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아셨죠.”

부모님을 도와 집안일을 도우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전에는 없던 배움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다.

“너무 배우고 싶었어요. 간절히 원하면 길이 생긴다고 하던가요. 그 당시 저희 가족들은 경기도 광명시에 살고 있었는데 아는 분의 소개로 시흥의 공단에 취직을 할 수 있었어요. 정말 운 좋게도 너무 좋은 분을 만나 야간학교를 들어가 공부를 하며 일 할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힘들었지만 최고로 행복한 때였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춘기 소녀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지만 최 씨는 힘든 줄을 모를 정도로 행복했다.


다시 제자리로…

부모님은 최 씨가 벌어 온 돈을 차곡차곡 모아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건강하지 않은 몸으로 부모님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셨다.

하지만 노력만으로 안되는 일이 있었다.
“하는 일마다 안되더라고요. 실패를 거듭하면서 희망 마저도 잃어가는 부모님을 보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결국 부모님은 도시가 싫다며 농촌으로 내려와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했죠. 그래서 외가집이 있던 영암으로 내려오게 됐어요.”

막상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전 재산이라고는 전세금밖에 없던 최 씨 부모님이 농촌에 와서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돈 때문에 또 한번 부모님의 새로운 시작이 꺾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최 씨는 큰 결심을 하게 됐다.
“그때는 몰랐었는데 제가 월급을 꽤 많이 받았었더군요. 퇴직금도 꽤 많아 퇴직금을 받으면 그래도 어느정도 정착할 자금이 마련될 것 같았어요. 공부도 할 수 있었고 돈도 벌 수 있었고 정말 버리기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부모님을 위해서 결심을 굳힐 수 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평소 최 씨의 성실함과 착실함을 눈여겨 봐오던 사장님은 월급을 가불해줄테니 남아달라고 붙잡았다.
“많지는 않았지만 작은 가게를 차릴 정도의 돈이었어요. 부모님은 그 돈으로 마을에 작은 공판장을 차리셨죠. 아버지는 제 손을 꼭 잡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어요. 시집 갈 때는 정말 최고로 남부럽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죠.”

잦은 실패로 자신감을 잃어가던 아버지는 공판장을 계기로 삶의 목표를 찾게 됐다. 아버지는 돈 많이 벌어 늦둥이 막내딸 대학까지 보내겠다는 다짐까지 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그리 길지 못했다. 가게를 열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늘 건강이 좋지는 않으셨지만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었어요. 오히려 엄마가 몸이 더 약하셔서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였거든요. 거기에 저는 검정고시를 몇일 앞둔 터라 충격이 몇 배 더 컸어요.”

잠도 못자고 쉬지도 못하고 시험 준비를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형제들은 도시에서 자리를 막 잡기 시작한 터였고 어머니는 너무 몸이 약해, 막내는 너무 어려 가게를 이어받을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최 씨 뿐이었다.


멀어져가 가던 꿈

아버지 장례식을 마치고 최 씨는 영암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원하던 일은 아니었지만 할 수 없었어요. 아버지를 대신해 가게를 보고 몸 약한 엄마를 돌보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는 일을 모두 떠안아야 했어요. 그래도 한번도 누굴 원망해 본적 없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었죠.”

최 씨는 그런 힘든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땅까지 살 정도로 돈을 벌었다.
동네의 많은 총각들이 열심히 사는 최 씨의 모습에 반하고 말았다. 최 씨의 공판장에는 새벽까지 동네 총각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인기 많던 최 씨를 낚아챈 남자는 누굴까?
“당시 영암은 간척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중장비업을 하던 남편이 일하러 이곳에 와 저를 보고 ‘아 내여자다’라고 느꼈다나봐요. 그날부터 남편은 결혼하자고 다가왔죠.”

오며가며 얼굴만 보던 남자가 결혼을 하자고 하자 최 씨는 당황했다. 하지만 장모님도 모시고 처제도 친동생같이 보살피겠다는 남편의 한결같은 말에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다. 어린 마음에도 이 남자라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은 결혼을 하게 됐다.
“원래 돈을 벌어서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공부도 시작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런 남자를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짜피 엄마를 모시고 살아야지 다짐을 했었는데 이런 남자를 만난 것도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죠. 도시도, 공부도 제 인생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고마운 사람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자 최 씨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배움에 대한 열정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잊고 살다가도 어디서 무슨 교육이 있다더라는 말만 들으면 뛰는 가슴이 주체가 안됐어요.
그래서 배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죠.”
아마 배움이 아니었으면 최 씨는 농촌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늘 도시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살았었어요. 그러다 보니 적응해서 살아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죠. 지금은 농촌 사람들도 농한기에 여행이며 교육이며 유익한 시간을 보내지만 당시 농촌 사람들은 농한기가 되면 모여서 고스톱을 치고 술 마시며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런 공동체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돌파구로 교육을 택한거죠.”

그렇게 빠져들어 배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보니 대학교에도 인연이 닿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버섯 농사를 지어볼까 하고 전남대 미생물학과 1년 과정 교육을 받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교에 대한 마음의 문턱이 점점 낮아 지더군요. 아버지의 죽음으로 포기했던 대학교의 꿈을 지금이라면 이룰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조심스럽게 가족들에게 의견을 물었죠.”

가족들은 대찬성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큰아들을 따라 최 씨도 야간고등학교를 입학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동아 인제대 사회복지과에 합격했어요. 드디어 평생의 소원을 이룬거죠. 졸업을 하고 사회복지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니 정말 내가 대단한 일을 해 낸것 같아 뿌듯하더라고요.”

생활개선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교를 다니느라 무척 고생을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조금 편해졌나 했더니 또 새로운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각종 회의에 끌려다니는 것도 모자라 교수의 추천으로 용양보호 심의 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몸은 많이 고되지만 이렇게 내 소원을 이루기까지 도와준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무리 모든 일에 소홀함 없이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지만 공부하랴 집안일하랴, 농사일에 생활개선회 활동까지 하려니 아무래도 모자람이 많았겠죠. 나를 이해해준 가족들과 주변분들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고마운 사람들에게 항상 베풀며, 보답하며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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