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키운 ‘강인한 어머니’에서 ‘강력한 군주’로

  
 
 ▲ 북한산 산정에 우뚝 솟아있는 진흥왕 순수비. 이 비는 신라 도약의 상징으로 진흥왕 이후 신라는 서서히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진흥왕의 놀라운 성취는 어린 시절 11년간 섭정했던 어머니 '지소태후'로부터 보고 듣고 배운 '국민 총화의 제왕학'이 
 
◇어린 아들
신라의 6세기는 영광의 세월이었다.
23대 법흥왕(재위 514~540)시절,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문물과 국가체제의 발달이 다소 늦었던 신라는 일신을 변모하며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의 통치체제를 완비했다.

법흥왕은 특히 524년 불교를 국교로 공인해,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이념적 기초를 만들었다. 본가야를 점령(532년)하면서 신라 남부의 강력한 세력인 가야연맹을 병합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흥왕은 왕위계승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에게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이라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인 김삼맥종(金三麥宗)이 24대 신라왕에 오르게 된다. 그가 신라의 정복군주로 이름을 떨친 진흥왕(재위 540~576)이다.

지소태후는 그의 어머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 자기 작은아버지와 결혼한 셈인데 이는 성골(聖骨)의 혈통순수성을 지키려고 왕실에서 근친혼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김삼맥종’ 즉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가 일곱 살에 불과했다.

지소태후는 진흥왕이 열여덟 살이 되던 551년, 친정(親政)을 할 때까지 11년간 섭정(攝政)했다. 지소태후 섭정기의 11년은 신라의 비약적 발전과 국력 향상의 발판이 돼, 결국 100여 년 후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고 한반도를 제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역사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은 지소태후의 섭정기는 어떠했을까?

◇혁신
“살인범 등의 흉악범과 자기 부모를 봉양하지 않아 잡혀들어 온 못된 자식들을 제외하고 가벼운 죄인들은 모두 석방하라.”

태후는 죄인들을 풀어주며 아들의 등극을 모든 백성이 기뻐하게 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힘센 병사들로 하여금 백성들의 울타리와 망가진 문, 벽을 수리해 주도록 해라.”

이와 함께 마을 곳곳의 수로(水路)와 시설물을 고쳐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 태후는 군사조직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선왕이 계실 때 우리는 본가야와 싸워 이기며 우리 군사들의 용맹을 이웃나라들에게 과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와 북으로 험한 산이 버티고 있고 동과 남으로는 바다가 둘러싸고 있으니 이는 나라가 한 구석에 갇혀있는 꼴이다.

군사조직을 정비해 사방의 사나운 적을 능히 막고 곡창지대로 진출할 수 있는 강군을 만들어야 한다.”
그녀는 특히 자주의식을 강조했다.

“선왕께서는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따로 쓰면서 우리 신라가 다른 나라에 예속된 나라가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중국에 비해 나라가 작고 문물이 초라하나 엄연한 국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태후는 어린 진흥왕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진흥왕은 551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연호를 ‘개국(開國)’이라 칭하고 당당한 자주국의 기개를 떨쳐보였다. 그는 568년 ‘대창(大昌)’, 572년 ‘홍제(鴻濟)’와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잇달아 반포하며 투철한 자주의식을 보여준 군주였다.

◇‘화랑제도’ 확립에 영향
지소태후에 대해 무엇보다도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그녀가 화랑제도의 전신인 원화제도의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신라에는 원래 마을의 청소년들을 무리 지어 놀게 하면서 무리 나름대로의 규율과 무리 안에서의 세력 형성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조직의 리더 역할을 하는 청소년들을 눈여겨 보았다가 국가의 인재로 키워나가는 특유의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을 국가가 공인된 제도로 만든 것이 진흥왕(576년) 때다.

‘원화(源花)’라 불리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여자였던 것은 신라고유 토착종교의 ‘여사제’를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일종의 무당 같은 것이었다.

이는 지소태후가 고유종교에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소태후는 어린 아들을 지키는 ‘강인한 어머니’에서 신라를 한반도의 강국으로 만들어 나가는 ‘강력한 군주’로 거듭나고 있었다.

어린 진흥왕은 어머니의 뛰어난 통치능력을 보고 배우면서 유년기를 거쳐 청소년기, 성년에 이르게 된다. 진흥왕은 최고의 ‘제왕학’ 선생님 밑에서 11년 간 제대로 배운 셈이다.

◇진흥왕 한반도의 패자(覇者)로
진흥왕은 18세에 친정을 시작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는 틀림없었으나 그의 뒤에는 어머니 지소태후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다져놓은 탄탄한 왕권과 잘 정비된 국가체계 속에서 순탄하게 자신의 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
‘진흥왕 순수비’로 유명한 그의 정복활동은 지금의 경북지역에 국한됐던 신라의 영토를 한강유역을 거쳐 북으로 함흥평야에 까지 이르게 했다.

내치에도 힘을 쏟은 왕은 거칠부에게 명해 ‘국사(國史)’를 편찬케 하여 왕통(王統)을 확고히 다졌다(545년). 544년 흥륜사(興輪寺), 566년 황룡사(皇龍寺)·지원사(祗園寺)·실제사(實際寺)를 완성하고, 선진불교를 적극 받아들여 신라 불교를 육성했다. 어머니가 심혈을 기울이던 원화제도를 계승 해 576년 화랑제도(花郞制度)를 정비한 것은 큰 업적이다. 화랑제도는 신라의 삼국병합에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아들들의 연애행각 때문에 속깨나 썩은 어머니였다. 그들 모자 앞에 신라, 아니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막강한(?) 요부 ‘미실’이 등장한 것이다.

◇요부(妖婦) 미실 등장
미실은 천부의 절세가인으로 특히 어려서부터 ‘대원신통’이라는 가문에서 남자를 즐겁게 하는 절정의 방중술을 훈련받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미모를 일컬어 사람들은 “세상의 아름다운 정기가 한데 모여 만들어 졌다”고 경탄했다. 지소태후의 또 다른 아들 ‘세종전군’은 미실을 아내로 맞아들인 뒤 건강이 나날이 악화됐다. 그것은 미실을 지나치게 탐했기 때문인데, 태후는 이를 못 마땅이 여겼다.

태후는 아들의 목숨까지 위험하다고 여겨 미실을 궁 밖으로 내쫓아버린다.
그런데 그 날부터 아들 세종전군은 식음을 전폐하고 사경에 이르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미실을 궁으로 불러들인 태후는 이후 평생을 두고 미실과 라이벌 관계를 유지한다.

미실은 결국 진흥왕까지 자기 품으로 끌어들여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린다. 미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소태후의 손자(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 그리고 동륜태자의 이복동생으로 뒷날 진지왕이 되는 금륜태자 3부자,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대왕 등 왕실의 핵심인물들을 색정의 포로로 만들어 점점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정복군주 진흥왕도 미실 앞에만 가면 호랑이 앞의 강아지 꼴 이었다. 한번은 미실이 궁 밖으로 나가자 진흥왕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발 돌아와 달라”고 그녀에게 구걸(?)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미실은 신비한 매력과 절세의 색공으로 왕실의 남자들을 모두 포로로 만들어 버리고는 사실상의 전권을 휘두르게 된다. 진흥왕도 그녀와의 지나친 색사로 576년 8월에 43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왕실 무기력 한탄하다 생 마쳐
지소태후의 사망 년대는 정확치 않으나 대략 56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미실이 궁으로 들어 온 이후는 미실의 권력 장악 과정과 이에 맞서는 지소태후의 치열한 정쟁의 세월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소태후는 왕실 남자들의 무기력(?)에 한탄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눈을 감았다.

신라는 이후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다가 676년 고구려를 병합하면서 삼국시대의 패자가 된다. ‘신라의 힘’인 ‘국민총화의 정신’은 지소태후 시절에 원화제도의 확립을 통해 다져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소태후 아래서 제왕학을 익힌 진흥왕은 경제, 사회, 문화, 군사, 국민의 민도(民度) 등 모든 면에서 신라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사실 이후 신라에서 세 명의 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소태후가 여성으로서 완벽한 통치를 해 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지소태후는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성취에 비해 홀대 받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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