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멀리있지 않아요”

  
 
  
 
고랭지배추의 농사가 예전만 못하다. 인건비와 운송비의 인상으로 제값을 건지기 어려워졌다.
거기다. 올해는 날이 가물어 배추잎마저 많이 말라버렸다.

그런데도 고랭지 배추 농사를 짓고 있는 양채봉(51세) 씨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서려있었다.
풍년이든 아니든 농촌에 사는 것이 행복하고 농업인이어서 행복하다고 하는 양 씨.
그녀의 행복은 성공도 아니고 돈도 아니었다. 삶 그 자체였다.

배추와 함께한 30년

1976년, 스무살 어린 처녀였던 양 씨는 신길선(60세)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친정집도 농사를 짓기는 했지만 학생이었던 양 씨에게 부모님은 일을 시키지 않았었다.
농사일 하나만으로도 벅찰텐데 스무살 어린 새댁은 농사면 농사, 집안일이면 집안일 불평한마디 없었다.

“시댁은 그야말로 농사꾼 집안이었어요. 식구도 대식구여서 한 집에 4가족이 살고 있었죠. 한번도 농사꾼에게 시집온 것에 대해 불평을 하거나 일이 힘들어서 못살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농사일이며 집안일이며 어린 나이에 시집와 아무것도 몰랐으니 하루하루 일 배우느라 정신 없었죠. 하지만 남편과 시부모님이 잘 이끌어줘서 힘든 줄 모르고 살았죠”

결혼 후 2년이 됐을 무렵 양 씨 부부는 분가를 하게 됐다. 분가를 하게 된 양 씨부부는 새로운 목표에 도전을 해 보기로 했다.

“지금이야 강원도하면 고랭지 채소, 그중 고랭지 배추부터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지만 그 당시에는 고랭지채소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소득원으로 서서히 각광을 받고 있던 시기였거든요. 배추를 떠올리자 바로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고 남편과 저는 그 날로 배추에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고랭지 배추를 키우기 좋은 땅을 구하기 위해 귀네미 마을로 이사도 했다. 처음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변에 고랭지배추 농사를 짓는 농가가 드물었기 때문에 노하우를 전수받을 곳이 전무했다. 부부는 발품을 팔았다. 여기저기 견학도 다니고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기를 몇 해.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부부는 고랭지 배추농사에 성공을 거뒀다.
“배추농사를 시작한지 벌써 30년이나 됐네요. 배추농사로 아들 셋 대학 공부시키고 장가까지 보냈으니 배추와 함께 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비결이라… 열심히 하는거죠”

지금의 순박하고 너그럽고 참해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젊은시절 양 씨는 ‘여장부’였다. 한다.
남편 신 씨는 “성격이 얼마나 씩씩한지 몰라요. 어떤 일이든지 맡으면 아무리 힘들어도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다니까요. 그런 모습을 보면 내 일을 뒤로 잠시 미루더라고 외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죠.”
양 씨는 지금까지 농사지으며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이런 남편 덕분이라고 했다.

“농촌에 사는 두 아이를 가진 다른 엄마들은 아이 키우며 농사짓기도 벅찼을텐데 저는 둘째를 낳고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스물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면부녀회장을 맡았죠. 그 당시에는 힘들다는 생각보다 학교만 다니다 시집와 처음으로 하는 사회생활에 들떠 힘든줄 몰랐죠. 열심히 하긴 했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어 주위의 도움이 없었으면 힘들었을꺼예요. 농사와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바깥으로 도는 부인을 좋게 보는 남자가 어디있겠어요. 그렇지만 남편은 오히려 자신의 일인것처럼 좋아하고 진심으로 응원해줬어요. 남편이 아니었다면 모든 활동이 불가능했죠. 다들 제가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모두 남편과 가족, 주변분들 덕분이었어요.”
한일이 없다며 손사레를 치는 양 씨를 보더니 못참겠다는 듯 남편 신 씨가 나섰다.

“나이도 어린 새댁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마을 어른들 모두 감탄할 정도였어요. 우리 면에서 기금이라는 것도 우리 아내가 처음으로 조성하기 시작했죠. 지금 우리 마을이 이렇게 살기 좋아진 것이 모두 다 아내 덕분이예요. 저 뿐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남편의 말을 듣고 부끄럽다는 듯 양 씨가 입을 땠다.

“그 당시에는 기금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그냥 마을 일이라면 손걷고 나서서 일 돕는 것이 최선이라고만 생각했죠. 하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모임에 어느정도 돈이 있어야 더욱 탄탄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다고요.”
그래서 양 씨는 회장을 맡자마자 부녀회 기금조성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배추농사만으로도 벅차지만 마을의 공터를 이용해 고구마도 재배해서 판매하고 각종 행사때마다 손을 걷고 나서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얼마지나지 않아 그 당시 엄청나게 큰돈이었던 2백 만원을 모을수 있었고, 그 돈으로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컴퓨터를 기증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는 컴퓨터를 구경조차 하기 힘든 시기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가로등도 없고 길도 좋지 않아 거의 고립돼 있던 양 씨의 동네에 길이 뚫리고 가로등이 들어왔다. 이것 모두 양 씨와 부녀회의 도움때문이었다.

“부녀회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어느정도 성과가 보이니 마을분들 모두 부녀회의 활동이라고 하면 모두 적극적으로 도와줬어요. 부녀회가 나서면 안되는 일이 없을 정도였죠. 고생도 많았고 힘들었지만 정말 뿌듯한 마음으로 활동했어요.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감사해”

양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림한번 농사한번 해보지 않고 시집와 힘든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어린 나이에 시댁 어른들을 모시는 일도, 처음 해보는 살림살이와 농사도 그녀에게는 모두 서툴고 힘든 일이었다.

“사실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며 살았나 되돌아 볼때가 많아졌어요. 농사일에 쫓기고 살림에 쫓기고 단체일에 쫓기며 정신없이 살아온 것만 같았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바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특히 생활개선회장을 맡고 나서는 눈코뜰새가 없을 정도로 바쁘죠. 하지만 지금보다 덜 바빴었던 때에도 나를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는 가질 수 없었는데 지금같이 바쁜 와중에도 이런 생각에 잠길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에 무척 감사해요.”
양 씨는 지금껏 소개돼 왔던 다른 생활개선회원들처럼 거창한 계획도 이루고 싶은 꿈도 없다.

“아직 나이가 젊으니 뭔가 더 배울 수도 있고 더 큰 무대에서 활동할 수도 있겠죠.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전 지금의 제 모습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할수 있는 지금의 위치가 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한데 뭘 더 바라겠어요.”
농촌에 살게 된 것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믿는 양 씨.

“물론 농촌에는 일이 끊임이 없죠. 하지만 그건 도시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지만 저같은 경우는 일년에 4개월만 열심히 일하면 여유시간이 무척 많은 편이예요. 도시에 사는 어떤 사람이 겨우 내내 남편과 친구들과 여행다니고 취미생활을 즐기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고유가에 인건비 상승, 가뭄까지 농사 짓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농사량은 늘었지만 소득은 예전같지 않다. 하지만 양 씨는 실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고랭지 배추 덕분에 아이들 대학에 유학까지 보냈어요. 지금은 아이들 모두 장가가서 손자까지 뒀죠. 지금은 남편과 둘이서 지금처럼 행복한 여생을 즐길 수 있을 정도만 욕심없이 농사짓고 살꺼예요. 아직 젊은 나이에 이런 소리 하면 어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정말 지금까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저에게 칭찬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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