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군생활개선회 백수열(52세) 회장은 항상 머릿속에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방앗간이 있는 김장 체험장을 운영하는 모습, 좋은 사람들과 봉사활동을 하며 행복해하는 모습, 강원도의 건강함을 책임지는 건강원 사장님…
이번 호에서는 꿈이 있어 오늘이 행복하고 즐겁다는 백 씨를 만나보자.



다시 농촌으로…
강원도 춘천 출신인 백 씨는 23살에 남편 정수만(55세) 씨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알콩달콩 신혼 재미가 쏠쏠하던 무렵 남편은 갑자기 백 씨에게 귀농을 제안했다.

“남편이 7남매 중 맏이였어요. 내려가서 농사지으며 부모님 모시고 살자더군요. 저는 아버지가 미군부대에서 근무하셔서 강원도에 살면서도 농사한번 안 지어봤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겁이 없었나봐요. 남편 생각이 그렇다면 따라가는게 옳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너무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던거죠. 처음 화천에 와보고는 생각이 짧았단 생각이 들었죠. 농촌생활은 상상 이상이었어요. 어찌나 충격적이었는지 날짜도 정확히 기억이 나요. 1982년 2월 28일 이었죠.”

한번도 해 본적 없는 농사일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힘들었다. 백 씨는 시집오기 전 4년간 해본 직장생활 덕에 농사일도 문제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출근 시간도 없고 퇴근 시간도 없고 월급은 더더군다나 없는 농사일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급하게 돈 들어갈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처음 1년간은 아무런 수입없이 보내고, 몇 해 동안은 소득이 일정치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당장 현금이 부족했죠. 산나물이며 더덕을 캐서 내다 팔기까지 했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억척스러웠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을 정도예요.”

백 씨는 주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더덕, 산나물을 내다판 돈으로 아이들 교육비며 생활비를 댈 정도였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아이들 피아노학원이며 과외며 도시아이들 부럽지 않게 해줬어요. 시골에서 컸다고 못누리고 살면 안되잖아요. 연년생이었던 두 아이를 이제 대학까지 보내놓고 보니까 내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네요.”

‘작은’ 변화가 가져온 ‘큰’ 희망
당시 화천군의 주 소득작목은 붉은 고추였다. 백 씨도 흐름에 맞춰 잡곡과 고추를 재배했었다.
“둘다 농사의 ‘농’자도 모르다 보니 남들 하는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늘 제자리 걸음이었죠.”

그러던 중 남편 정 씨가 춘천에서 애호박 재배 농가를 보게됐다.
“둘다 초보농사꾼이었지만 항상 남편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어요. 성공·실패를 떠나 남편이 하는 일은 무조건 지원해줬어요. 남편이 애호박으로 작목을 바꾸자고 했을때도 단 1%의 의심도 하지 않았어요. 애호박을 믿었던게 아니라 남편의 열정과 의지를 믿었던 거죠.”

정 씨는 결심을 굳히자마자 작업에 들어갔다. 작지만 알차게 작목반도 꾸렸고 애호박 재배 농가를 둘러보러다니고 공부도 시작했다.

“대성공까지는 아니었지만 저희 부부가 농사에 희망을 갖게하기에는 충분한 성공이었어요. 화천에 점점 애호박 재배가 늘어가면서 판로도 많아지게 됐죠. 사실 한번도 남편이나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거나 도시로 가고 싶단 소리를 해본 적은 없지만 늘 과연 내가 농촌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날 이후로 농촌생활에도 희망이 보였어요.”

외조의 ‘힘’
백 씨는 1982년 생활개선회에 가입했다. 20년이란 긴 시간동안 변함없는 열정과 애정을 갖고 생활개선회 활동을 할 수 있는데엔 남편 정 씨의 외조가 큰 힘이었다.
정 씨의 가정적인 성격은 자타공인 화천 제일이다.

“사실 저 뿐만 아니라 생활개선회는 남편의 외조가 없으면 활동이 불가능해요. 바쁜 농사철에 집안일이며 농사일 다 미뤄두고 활동해야할때가 많은데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죠. 평소에도 남편은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는 편이예요. 행사가 있거나 교육이 있으면 남편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해내 제가 부담을 안느끼게 해줘요.”
백 씨의 남편 자랑에 시동이 걸렸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막걸리를 술이라고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힘든 농사일을 술로 달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우리 남편은 술·담배를 전혀 안해요. 착실하지, 집안일 잘 도와주지 매너좋지… 주위 친구들이 남편을 보고 무척이나 부러워해요.”

면회장 경력 5년에 군회장 2년… 지역행사다, 회의다 부르는 곳이 너무 많아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때가 많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지칠때가 있는 법, 백 씨도 가끔 너무 힘들어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질때가 있다.

“제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는 것 같으면 남편의 질책이 쏟아져요. 단 한명밖에 할 수 없는 회장 직을 남들 못하게 맡아놓고 그렇게 게으름을 부리면 어쩌냐는 거죠. 게으름을 부릴꺼면 하고싶어하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하려면 열심히 하라고 꾸짖어요.”
백 씨의 20년 생활개선회 활동의 원동력은 이런 남편의 당근과 채찍이었다.

‘유종의 미’를 위해…
5년전 생활개선회는 소득사업으로 단호박을 재배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친환경 단호박을 판매할 생각이었는데 당시 군수님이 단호박만 판매할 것이 아니라 단호박을 이용한 제품을 만들자는 건의에 찐빵을 계획했다.

단호박으로 쨈을 만들어 소를 넣고 단호박즙으로 노랗게 색을 낸 찐빵은 인기가 높았다.
처음 1년이 지나자 점차 사업규모가 커졌다. 소득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요했고 일체의 지원금 없이 자비로 공장을 짓기에는 너무 부담이 컸다.

“처음에는 집 공터에 작업장을 하나 만들까도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판로가 확실치가 않았고, 여자들끼리 사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 겁도 많이 났어요. 그래서 결국 농협에 사업을 이전했고 저와 생활개선회원들은 사업장에서 일을 하는 형식으로 사업을 꾸리기로 했죠.”

단호박 찐빵은 지역 축제때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단호박찐빵이 너무 잘 되자 여기저기서 따로 사업을 해보자는 권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위험부담으로 농협으로 미뤘던 사업을 이제와서 잘된다고 가져온다는 것은 양심상 허락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자꾸 그런 소리를 들으니 욕심이 나려고 하더군요. ‘원조’란 말을 붙여 더 맛있게 만들어 팔면 돈은 더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아니다 싶었어요. 더 욕심나기전에 올해를 마지막으로 서서히 단호박찐빵 사업에서 손을 떼려고 해요. 잘 될 때 손을 떼야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한도 끝도 없는 욕심
군회장을 맡은지 올해로 2년째, 너무도 바쁜 2년을 보내면서 느낀점이 많다고 한다.
“성격이 많이 내성적이었어요. 아마 도시에서만 살았다면 집안에만 틀어밖혀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또 회장이란 직위를 갖고 지내면서 많이 달라지는 내 자신을 느낄수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여러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면서 점점 내 자신이 발전하고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한해 한해 회장이란 직함이 익숙해지면서 자꾸 욕심이 커지는 자신을 느끼며 백 씨는 자신이 회장이란 직책을 갖고 경솔하게 행동한 적은 없었는지, 지금 위치에 어울리게 생활하고 있는지 자꾸 되돌아보고 더욱더 겸손하게, 낮추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욕심이 버려하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농촌이 그러하지만 집 주변에 널려있는 것이 약초들이다. 오미자, 더덕 등등… 백 씨는 이런 자연에서 체취한 약초들을 이용한 건강식품을 만드는 건강원을 운영하면 어떨까 늘 생각해봤다.

또,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도농교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느끼고 있는 백 씨다.
작은 방앗간이 있는 체험장을 만들어 직접 재배한 배추와 방앗간에서 직접 빻은 고춧가루를 이용해 김장을 담그는 체험장을 늘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언젠가는 꼭 실천에 옮기고 싶은 욕심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원래 봉사활동에 애착을 갖고 활동하는 편이어서 늘 봉사활동에 대한 계획을 항시 갖고 있어요. 하지만 면단위 회장시절과는 달리 군회장을 맡으면서는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가 쉽지가 않더군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작은 봉사단체를 만들어 회비를 통한 후원금도 조성하고 봉사활동도 할 수 있는한 최대로 활동해오고 있어요. 내년에는 화천군에서도 면생활개선회들 만큼의 봉사활동을 했으면 해요. 그러려면 제가 더 많이 뛰어야 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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