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남원시생활개선회장 홍순자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홍순자(59세) 씨의 웃는 모습에서는 나이를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함이 가득했다. 가식이나 거짓된 표정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같이 맑고 밝은 모습에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그녀와 마주앉은 순간 마음속의 긴장의 끈이 ‘탁’하고 풀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욕심을 조금만 버리면 젊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홍 씨. 그녀의 행복의 비법을 살짝 훔쳐보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情’

홍 씨는 자신의 지금 모든 활동을 하는 밑바탕에는 자신의 부모님에게서부터 비롯된 정신이 있다고 말한다. 수호정이라 불리는 예쁜 섬이 있는 강가, 산 좋고 물 좋은 섬진강 줄기에 홍 씨의 집안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저의 마을에는 홍 씨 집안과 정 씨 집안, 이렇게 두 성 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어요. 넉넉한 살림들은 아니었지만 좋은 경치를 늘 보고 살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여유있고 정이 많았죠. 특히 저희 집안은 콩 한쪽도 나눠먹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며 손님 접대하는 것을 좋아하기로 유명했어요.”

늘 손님들과 친척들로 북적였던 집안… 홍 씨의 부모님은 주변 친척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모두 자기 일처럼 감싸안았다.
그래서 였는지 홍 씨의 집에는 늘 사촌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집안이 어려운 조카들을 맡아 친 자식처럼 돌보셨는데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어렸을때부터 늘 봐와서 그랬는지 전혀 낯설지 않았어요. 십년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촌오빠가 꽃상여를 해왔더군요. 그러면서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는데 갚을 길이 없었다고 울며 이야기를 해 주는데 그제서야 내가 봐온 것 이상으로 부모님들이 남들에게 많이 베풀고 살았구나 알게 됐죠.”

이 때문이었을까· 홍 씨는 지금까지도 남을 돕고 사는 삶이야 말로 참된 삶이라 여기고 살아가고 있다.
남들과 어울려 살아야만 행복하고,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즐겁다는 홍 씨. 이제 보니 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천성이었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결혼

1971년, 홍 씨가 22세가 되 던 해, 남편 김동기(66세) 씨는 홍 씨의 마을로 선을 보러 왔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갑작스런 사정으로 선이 취소되고 김 씨는 홍 씨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됐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 화끈한 성격을 가진 남편을 보고 어른들이 모두 마음에 들어하셨어요. 거기에 술·담배까지 안 할정도로 성실한 모습에 반한 우리 부모님은 저와의 선을 추진하고 그 자리에서 날짜를 잡게 됐죠. 그때만해도 집안끼리 혼사를 정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어서 저야 남편과 말 한번 나눠보지 못한 채 결혼을 해야 했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결혼은 생각만큼 순탄하지 못했다. 그 정도의 인물에 따라다니는 여자가 없었다는 오히려 그게 이상할 터… 결혼식을 올리던 날 남편과 잠시 정을 나누던 여자가 결혼식을 방해하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정말 암담했죠. 시댁 식구들은 어쩔줄을 몰라하셨어요. 이대로 제가 도망가기라도 할까봐 노심초사하셨죠. 어린 나이었지만 제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다짐을 하고 내색을 안하고 지냈어요. 평생 한번 뿐인 결혼식을 망쳤으니 속으로야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죠. 하지만 이미 이 집안 사람이 됐으니 마음을 굳게 먹고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모습을 보고는 시댁 식구들도 저를 자신의 가족으로 확실하게 믿게 됐죠.”

팔방미인 새댁

시집와서 하는 일 모두가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농사 일도, 집안 일도, 어른들 모시는 것도…
“처음 시집왔을 때 일반적인 농사꾼 집안이었어요. 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었죠. 시집오기 전 까지는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생각해보면 신기한 것이 처음 해보는 농사인데도 힘들다 어렵다는 생각 한번 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내곤 했어요. 그러다보니 일이 금방 익숙해졌죠. 제 농사경력도 따져보면 화려해요. 논·밭 농사에 한우·젖소 사육, 누에, 담배, 인삼까지… 안 해본 것이 없죠·”
요즘 같은 시대에 22살 새댁이라면 전기밥솥에 밥하는 것 조차도 힘들어 할텐데 홍 씨는 종가집 제사에 농사일, 집안 일까지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척척 해냈다.

“저희 집안이 양반 집안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예절과 격식은 어린시절부터 몸에 베어 있었죠. 당시 시댁에 제사가 1년에 8번이나 됐어요. 명절 차례까지 며느리가 혼자다 보니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죠. 처음 자신은 없었지만 어렸을 때 보고 배운대로만 하자고 마음 먹고 상을 차렸는데 시어머니가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이런걸 언제 다 배워왔냐면서요. 그 다음부터는 거의 저 혼자 하다시피 하게 됐는데 힘들기보다는 상차리고 음식준비하는 것이 즐거웠던 것을 보면 음식 만드는 것이 제 천직이었던 모양이예요.”

끝인줄로만 알았던 고비

“제가 음식에 소질이 있긴 했나봐요. 음식 잘 한다는 소문이 농업기술센터에까지 퍼졌더군요. 센터의 권유로 생활개선회에 가입하고 생활개선회 대표로 약과를 만들어 시식행사를 가졌어요. 그때 인정을 받아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청까지 와서 시범을 보이고 도지사 상까지 받았었어요. 점점 활발한 활동을 하기 위한 시동을 걸고 있을 때 제 인생의 고비가 찾아왔어요.”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결혼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집안 일로 인해 크고 작은 충격이 계속 쌓여 있던 차였다. 그나마 음식과 생활개선회 활동으로 활력을 점점 얻어가고 있던 때 사고가 벌어졌다.

“제 음식 맛 때문에 일꾼들이 저희 집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항상 집에는 일꾼들이 많았죠. 그러던 중에 일꾼 한분에게 경운기 사고가 났어요. 다리가 절단되는 큰 사고였죠. 그 일로 그 동안 받아왔던 충격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것 같았어요. 그날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됐죠.”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손도 까딱 할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병원을 다녀봐도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병명을 알 수가 없으니 병원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약조차 지어먹을 수 없었다. 남편은 민물장어며 붕어며 몸에 좋다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왔다.

남편의 정성 덕분이었을까, 홍 씨의 삶에 대한 의지덕분이었을까.
홍 씨는 투병 3년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병이 나은 것이 전부가 아니더군요. 저도 저지만 남편도 제 병간호를 위해 농사일도 접은 상태라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어요. 음식을 잘 하니 서울에 가서 식당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동안 정들었던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 오더라고요.”
그렇게 부부는 절망에 주저앉아 있었다.

다시 찾은 희망

그러던 중 홍 씨 부부에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계장이나 돈사에서는 왕겨를 공급받기가 힘들다더군요. 하지만 저희 동네에는 전국에서 최고로 규모가 크다는 방앗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왕겨를 처리하는 것이 골칫거리래요. 그래서 돈을 주고 싣어가 버린다는 말을 듣고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왕겨 사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순전히 홍 씨이 아이디어였다. 그 당시만해도 흔치 않은 사업이었다. 하지만 부부가 매달릴 곳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었다.

부부는 왕겨를 가져다 양계장을 만드는 곳에 배달을 했다.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고객확보는 어렵지 않았다. 전국 가리지 않고 왕겨를 필요로 하면 달려갔다. 배달만으로도 꽤 많은 이익이 생겼다.

“다행히 저희는 규모가 큰 왕겨 공급처가 있는 셈이었잖아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막상 시작을 해보니 저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업이 잘 되더군요. 모자란 분량을 채우기 위해 밤을 세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래도 행복했어요. 벌써 사업을 시작한지 18년이나 됐네요. 지금은 두 아들이 아버지를 도와 사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그렇게 다시 일어선 홍 씨는 본격적으로 생활개선회 활동에 뛰어들었다.
1998년 면회장을 시작으로 시 부회장을 거쳐 시 회장까지 생활개선회는 홍 씨가 살아가는 힘이 돼줬다. 2002년 홍 씨는 생활개선회 덕분에 천직처럼 생각되는 폐백,한과 사업도 시작할 수 있게됐다.

욕심을 버리면 행복해져요

이렇게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음에도 홍 씨의 얼굴에서 그늘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비결이 뭘까·
“욕심을 버리는 거예요. 욕심을 버리면 세상에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져요.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게 어디있겠어요.”

홍 씨의 집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워낙에 사람을 좋아하는 탓도 있겠지만 맛있는 음식과 넉넉한 인심덕에 홍 씨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홍 씨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바로 이 ‘인복’이다.

“누구나 1번으로 생각하는 친구가 있잖아요. 저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요. 저를 1번으로 생각하는 친구들과 지인들이 손에 꼽지 못할 만큼 많을꺼란 것을요. 왜냐하면 저도 그들 모두를 1번 이상으로 생각하고 대하거든요. 항상 이웃들이 신기해해요. 그 집은 어떻게 하루도 안빠지고 하하호호 즐겁냐고요. 왜 안 즐겁겠어요. 세상에는 행복한 일 투성인데요. 세상살이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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