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태(胎)에서 새 세상이 나왔느니라”

  
 
  
 
오논강(江)을 따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이 이어지고 있다. 후엘룬은 남편 칠레두가 이끄는 마차 속에 앉아 시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혼 행렬은 늘 조심스럽다. 언제 어디서 괴한들이 나타나 신부를 납치해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부의 납치를 막기 위해 맞서 싸우다 보면 일행이 모두 죽고 마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결혼했다.

피랍(被拉)
메르키트 부족의 ‘칠레두’는 여자들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올쿠누트 부족을 찾아와 그중에서도 빼어나게 예쁜 처녀 ‘후엘룬’에게 구혼했다.
후엘룬도 그를 좋아했고 그녀의 부모들도 결혼을 흔쾌히 허락했다.
당시 신부를 맞이하려면 신부가족에게 많은 지참금을 주어야했고 그 집에서 몇 년간 머슴노릇을 해야 했음에도 칠레두는 기꺼이 일했다.

마침내 약속된 시간이 흘러 칠레두는 후엘룬을 데리고 자기 부족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황소가 끄는 수레마차속의 후엘룬도, 그 옆에 말을 타고 소의 고삐를 잡은 칠레두도 이제 며칠 후면 시작될 새로운 인생에 가슴이 부풀어 있었다.

이들이 초원에서는 보기 드문 한 외진 산골짜기에 도달했을 때였다.
매사냥을 나왔던 몽골부족의 ‘예수게이’라는 사내는 산속에서 이들을 지켜보다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어린 신부의 모습을 보고 넋을 잃고 말았다.

‘내 주제에, 이렇게 가난한 놈이 어떻게 저런 아내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얼른 마을로 돌아가 자기 형제들에게 이를 알렸다. 신부를 약탈하자는 것이다. 예수게이의 동생들은 기꺼이 형을 도왔다.

그들은 산골짜기로 들어선 칠레두의 앞을 갑자기 막아서고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칠레두는 필사의 저항을 했으나 애초에 고집을 부리고 혼자 움직인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순순히 잡히지 않으면 어차피 남편은 죽은 목숨이야.’ 후엘룬은 그 위급한 와중에서도 칠레두에게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의 일생에서 여자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여자들이 사랑스럽거든 그들을 후엘룬이라고 불러줘요. 내가 잡히건 안 잡히건 나를 구하려다가는 어차피 당신은 죽은 목숨이니 이제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려요.”
후엘룬은 그러면서 자기 체취가 배인 저고리를 벗어 칠레두의 얼굴에 던지며 “메르키트로 돌아가면서 내 냄새를 맡고 나를 잊지 말아요”라고 소리쳤다.

눈물을 뿌리며 달리는 칠레두의 모습이 멀어져 갔다. 칠레두는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며 말을 달렸다. 후엘룬이 득의양양한 예수게이 형제들에게 잡혀온 곳은 몽골족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세력이 미미한 보르지긴 씨족의 마을이었다.
‘안녕 칠레두….’ 후엘룬과 칠레두는 그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핏덩이를 쥐고 나온 아이
잡혀 온 후엘룬에게 더 기가 막힌 것은 예수게이에게 이미 아내가 있고 두 아이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두 여인은 좋든 싫든 지척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야한다. 풍족한 양고기와 유제품을 먹고살던 후엘룬은 이 가난한 마을에 잡혀와 새, 물고기와 심지어 쥐까지 먹어야 했다.

1162년 말의 해, 후엘룬은 예수게이의 장막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오른손에 뭔가를 꼭 움켜쥐고 태어났다. 이제 16살을 갓 넘은 젊은 엄마는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아이는 손가락만한 핏덩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이것이 좋은 징조인지, 불길한 징조인지 모르겠네….’ 젊은 엄마는 생각했다.
예수게이는 이즈음 타타르족과의 싸움에서 ‘테무진 우게’라는 전사를 잡아 죽였는데 그는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테무진’이라고 지었다.

테무진이 아홉 살이 되자 예수게이는 테무진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초원을 여행하다가 어느 마을에서 ‘부르테’라는 소녀를 발견한다. 양 부모는 짝을 맺어주기로 약조했다. 예수게이는 관례대로 테무진을 그 집에 맡기고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 테무진이 부르테를 신부로 맞이하려면 청년기까지 그 집에서 일을 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게이는 집으로 돌아오던 중 예전에 자기가 죽인 ‘테무진 우게’의 부족민과 마주쳤다. 예수게이는 시치미를 떼고 그들과 어울렸다. 그들도 예수게이를 못 알아보는 듯 했다.
그들은 양젖을 예수게이에 대접했다. 그러나 그것을 마신 예수게이의 정신은 혼미해 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들은 예수게이를 알아보고 양젖에 독을 타 복수했던 것이다.

예수게이는 간신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숨을 거두고 만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예수게이는 두 과부와 열 살이 안 되는 아이들 일곱 명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관습상 예수게이의 동생들이 두 과부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으나 그들은 가난했다.
저 많은 입을 어떻게 풀칠한단 말인가. 마을의 씨족들은 암묵적으로 그들 가족을 버리기로 했다.

죽음의 평원에서…
관례대로라면 예수게이의 보르지긴 씨족을 다스리던 타이치우드 부족은 이 불쌍한 가족을 돌봐야했다. 그러나 훌륭한 사냥꾼이요, 일꾼이었던 예수게이가 죽어 없어진 지금 이 가족들은 그들에게 무거운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이들은 오논강 하류의 여름캠프로 이동하면서 이 가족들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이것은 ‘너의 가족들은 여기서 죽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후엘룬 가족을 뒤로하고 행렬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때 한 노인이 무리를 꾸짖기 시작했다.
“이 불쌍한 가족을 여기 남겨두고 우리만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 그러고도 너희들이 위대한 텡그리 신의 자손들이란 말이냐?”

그러자 어떤 사내가 “당신이 우리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이것이 초원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숱한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를 잃고 저렇게 버림받아 초원에서 연명했다. 살아나면 살아남는 것이고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이 먹은 놈이 그것도 모르느냐”라고 맞받아쳤다.

둘은 한참 더 논쟁을 벌였다. 사내는 노인의 뒤로 돌아가더니 그의 등에 창을 꽂아버렸다. 후엘룬과 테무진,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그 광경을 충격 속에 지켜봐야했다.

무정한 그들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바로 그때, 모두가 노인의 비참한 죽음과 살기등등한 사내의 기세 앞에 얼어붙어 있을 때, 후엘룬은 놀라운 용기를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10여 년 전, 예수게이에게 납치당할 때 칠레두를 살리기 위해 보여주었던 믿을 수 없는 냉정함과 침착함, 담대함의 그 모습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남편 예수게이의 말총 영기(말총으로 장식한 깃발)를 높이 들고 말에 올라 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무리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무리를 따라 잡고 그 무리를 빙빙 돌며 그들의 수치심을 자극했다.

예수게이의 말총 영기. 그것은 ‘예수게이가 타이치우드 부족을 위해 평생 얼마나 많은 전쟁과 사냥과 공동작업과 부족민으로서의 의무를 위해 피와 땀을 흘렸는지 너희들이 모른단 말인가’하는 시위에 다름없었다.
부족민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후엘룬의 당찬 행동 속에서 예수게이의 혼령이 부족에게 복수할 것이라는 공포감마저 그들을 엄습했다. 그러나 방금 전 노인을 한 창에 꿰뚫어 버렸던 그 사내의 눈은 더욱 더 벌겋게 충혈 되고 있었고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져 갔다.
후엘룬과 테무진 그리고 이 가족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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