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대영 한국식품연구원 미래전략기술연구본부장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추모열기가 온 나라에 물결칠 때(2월 19일),  “우리나라 고추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백성들은 임진왜란 발발 훨씬 전부터 고추를 재배하여왔고, 고추를 이용하여 고추장 등을 제조하여 먹어왔다”라는 내용이 주요 일간지와 농업인신문(2월 23일자)에 보도된 적이 있다.

필자가 고추의 전래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된다. 필자는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선친을 따라 땔감을 하러 다녔다. 땔감을 하러 작은 절에 갈 때 아버지께서는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무학대사와 함께 이절에 와서 고추장을 먹고 하도 맛이 있어서 조선을 세운 뒤 진상하라 하여 드셨다’라는 말을 들려주시곤 하셨다.

어렸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필자에게는 고추의 일본전래설에 관심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필자에게는 일본전래 설에 대한 의문점들이 많았다. 일본에는 고추로 만든 음식이 없는 데 임진왜란 때 고추를 무슨 이유로 우리나라로 갖고 들어 왔을까? 유럽에서 중남미 고추인 아히(aji)가 들어 왔다면 토마토, 타바코(담배)등과 같이 적어도 아히 아니면 피망(piment)과 같은 유럽식 이름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 데, 오히려 당초, 번초, 만초 등 순전히 중국식 이름이 왜 부쳐졌을까? 등 수 많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1980년대 말 당시 학력고사문제 중에서 조선초기 시대의 생활상과 맞지 않은 것으로 ‘고추를 앞마당에서 말리고 있다’ 항을 고르도록 하는 내용이 출제되었다. 그 때 나는 학생들은 고추의 임진왜란 때 일본전래설만을 배울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고, 빨리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무비판적으로 영영 굳어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위기감을 느끼었다.

결정적으로 1990년 일본을 처음 방문하였을 당시 일본 ‘식품원료학’이라는 책에서 고추는 조선으로부터 가토기요마사가 가지고 들어 왔다는 내용을 접하고 나서 고추의 일본전래설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 후부터 본격적으로 고추의 전래에 대하여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런 상태로 몇 년이 흘러갔을 때 고추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든든한 동역자를 만났다. 다름 아닌 한국학을 전공한 아내였다. 정말로 몇 년 동안 고추에 대하여 아내와 밤낮으로 토론하고 수백편의 고문헌을 같이 분석하였다. 수십종의 고추와 수백편의 고문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결과 발표이후 몇몇 네티즌사이에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상황, 즉 친일 극복의 시각으로 본 연구결과를 해석하려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당황하였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민족주의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다만 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진실을 이야기하는 자연과학자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고추의 일본전래설을 뒤집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일본에서 고추가 들어왔다는 주장을 너무 매도하지는 말자. 이런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풀어야 한다. 이제는 문화와 역사도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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