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몰락 자초한 무한 권력욕의 여인

  
 
  
 
◆이상한 유언
서기 1908년, 찬란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베이징(北京)의 자금성에서는 76세의 노파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난 50년 가까이 여인의 몸으로 대(大) 청 제국을 한 손아귀에 주무르던 ‘서태후(자희태후)’의 임종이 임박한 것이다.

“저... 절대로... 헉헉... 앞으로 절대 여자가 정사를 농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서태후는 숨을 거두었다.
이상한 유언이었다. 자기 자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한 실질적 황제가 아니었던가? 그녀는 쓰러져가는 왕조의 마지막이 자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던 것일까?

◆황제의 아들을 가지다
서태후는 16살에 궁녀로 자금성에 들어갔다. 청나라에서는 궁녀를 ‘수녀’로 불렀다.
한족 농가의 딸로 태어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만주족의 귀족가문인 ‘예흐나라’가문에 입양됐다는 설도 있고, 만주족인 아버지 ‘혜징’이 관리생활을 하다가 누명을 쓰고 쫓겨나 산시성으로 옮겨 가 살았다는 설도 있다. 서태후는 실제로 산시성 민요를 어찌나 잘 불렀는지 그걸 들으면 누구라도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고 한다. 서태후는 입궐당시 만주어를 잘 몰라 궁녀들의 놀림거리가 됐다. 그때 이름은 ‘옥란’ 또는 ‘왕소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귐성이 좋았다. 궁에 들어간 지 1년이 안 돼 여러 내관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옥란은 한 내관에게 뇌물을 주고 ‘함풍’황제가 ‘이수원’에 놀러 갈 때 자신에게 꼭 알려달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회가 왔다. 황제가 이수원에 행차했다는 것이다.

이수원에 와서 술을 마시며 슬픈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황제에게 어디선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아름다운 산시성 민요가 들려오는 것이다.
황제의 귀에는 천상의 목소리와 다름없이 들렸다. 짐짓 모르는 체 하고 황제가 듣도록 옥란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자기 노래를 들은 남자들은 모두 반하고 만다는 것을 옥란은 알고 있었다. “당장 저 여인을 내 처소로 데리고 오라.”

그날로 옥란은 황제의 침소에 들었다. 황제는 그러나 옥란의 외모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옥란은 이 한 번의 동침으로 귀인의 직분으로 뛰어 올랐고, 그 수많은 황제의 여인들이 해내지 못했던 것, 바로 아들을 낳은 것이다.

◆수직 상승
옥란이 아들을 낳자 그녀는 귀인에서 의비로, 다시 귀비로 올라선다.
하지만 함풍황제는 다시는 옥란의 처소를 찾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이’귀비만 사랑했고 그녀가 낳은 딸들을 총애했다. 의외로 로맨티스트였던 황제는 그다지 여인들을 탐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이러한 태도는 옥란에게 적잖은 상처를 주었고 그녀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져 있었던 ‘독기’를 끄집어냈던 것 같다.

함풍황제 말년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필두로 애로우호 사건 등 국내외적으로 나라가 수렁에 빠져들던 시기였다. 그는 임종할 때가 되자 아무도 모르게 황후를 불렀다. 정식 황후인 ‘자안황후’(자안태후)였다.
“내가 죽거든 태자의 생모(옥란)를 멀리 귀양 보내고 사약을 보내 죽게 하라.”

놀라운 유언이었다. 태자의 어머니를 죽이라니…. 그는 옥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잔인성과 광기(狂氣)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1861년 나이 30을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유언을 비밀문서로 남겨 옥새와 함께 너그러운 자안황후에게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마음 약한 자안황후는 머뭇거리며 이를 실행하지 못했고 여러 해가 흘렀다.
황제 사후 이 귀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다. 궁궐에서는 태자의 어머니인 옥란이 그녀를 몰래 납치해 손발을 자르고 항아리에 쳐 넣어 죽였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진상은 알 수가 없었다.

◆서태후 천하
아들 ‘동치황제’가 즉위했다. 이 때 나이 불과 여섯 살이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해 두 명의 태후가 수렴청정(어린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가 대신 정무를 돌보는 것)을 시작했다. 함풍황제의 정실황후인 자안태후와 새 황제의 어머니 자희태후(옥란)이다. 자안태후는 동쪽 궁에, 자휘태후는 서쪽 궁에 살았기에 각각 동태후, 서태후로 부르게 되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옥란, 자휘태후는 서태후로 더 익숙한 이름이다.

온화하고 조용한 동태후 보다는 적극적이고 욕심 많은 서태후가 사실상 모든 정무를 맡게 됐다. 중국 천하가 그녀의 손아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함풍황제가 우려했던 그녀의 잔악성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온화한 동태후 측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서태후는 언젠가는 동태후를 제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런 마음을 표하지 않고 동태후에게 최선을 다했다.
수렴청정을 한지 12년이 넘어 선 어느 날 동태후가 병으로 쓰러졌다. 서태후는 탕재를 동태후 처소에 올리다가 그만 혼절하고 만다. 서태후의 시녀는 “자안태후님의 약탕재를 밤 새 손수 다리시다가 그만….”이라며 동태후에게 고했다.
이에 감동한 동태후는 서태후를 따로 불러 예전에 함풍황제가 자신에게 써 준 비밀문서를 서태후에게 넘겼고 서태후는 즉시 이를 태워버렸다. “이렇게 인자한 태후를 황제께서는 왜 그렇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서태후는 마음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선황제의 그 유일한 유지 때문에 수많은 세월동안 자존심을 숙여가며 너에게 숙였던 것이다.’

서태후는 정말 무서운 여자였다. 그녀는 그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동태후를 대하는 서태후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동태후는 얼마 후 서태후 전에서 올린 떡을 먹고 사망했다. 독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몰락하는 대제국
모든 라이벌을 제거한 서태후는 무소불위였다. 아들인 동치황제가 18세를 넘었고 혼인까지 했으나 정무는 여전히 서태후가 주물렀다. 심지어 아들의 잠자리 파트너까지도 간섭하는 어머니 때문에 동치황제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그는 사복으로 몰래 갈아입고 홍등가를 드나들었다. 동치황제는 그 후 얼굴과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는 병을 겪다가 1874년 12월에 사망했다. 서태후는 동치황제의 동치황후도 몹시 싫어했다.

서태후의 눈 밖에 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동치황후는 서태후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다 1874년 2월 2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치황제의 뒤로는 청나라 11대 광서황제(재위 1874∼1908)로 그는 순전히 서태후의 입김에 의해 황제에 올라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황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무너져가는 청나라를 걱정하며 189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같은 개혁의 일환으로 무술(戊戌)변법을 주창하며 개혁을 시도했지만 서태후 일파의 쿠데타로 실패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운동이 일어나 서구열강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광서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피난했다. 서태후는 이때 황제의 총애를 받던 진비(珍妃)가 황제의 마음을 흐린다하여 그녀의 수족을 잘라 우물에 쳐 넣어버렸다. 황제는 1901년 베이징으로 돌아왔으나 서태후 일파에 의해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년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서태후는 황제가 죽은 바로 다음날 사망했다. 광서황제의 뒤를 이은 이가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이다.

그는 후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고 평민으로 살다 삶을 마감했다.
서태후는 철권을 휘두르며 폭정을 일삼은 ‘무한 권력의 악녀’였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측천무후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며 중국 대륙을 호령했지만 그녀의 끝없는 탐욕과 권력욕은 수억의 중국 인민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결국 서구 열강에 의한 중국의 몰락을 가져왔고 자기 자신의 제국마저 멸망시켰던 것이다.

그녀의 옷, 장식물, 각종 금은보화, 여름 별장의 호화로움, 한 끼 식사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농민 4만 명이 먹을 수 있는 비용이었다고 한다)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중국 인민들은 세계사 속에서 가장 격동의 시기에 무한 권력욕에 함몰된 잘못된 황실의 지배를 받는 바람에 100여 년 이상을 모진 고난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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