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는 서양 노예와 달라”

“노비 얼굴에 글씨를 새긴다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설정입니다. 서양의 노예와 혼동해서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노비의 신체에 표시를 남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도망간 노비와 이들을 잡는 추노꾼의 이야기를 다룬 KBS 드라마 ‘추노’가 시청률 30%를 돌파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실제로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시대 노비 전공인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한국학자료센터 운영실장)는 2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도망갔다 잡힌 노비의 얼굴에 글씨를 새기는 드라마의 설정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이나 고문서 등 자료를 다 봐도 사노비든 공노비든 노비의 신체에 표시를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면서 “정복전쟁으로 포로가 된 노비라면 개연성이 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비에 대한 처벌은 신체를 때리는 것이었으며 구타하는 신체 부위와 방법이 세세하게 있었다고 덧붙였다.

안 실장은 조선시대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고 사노비는 다시 주인과 따로 거주하던 외거(外居)노비와 주인집에 사는 가내사환(家內使喚) 노비로 구분된다고 설명했다.

외거노비는 일반 평민이 국가에 세금을 내듯이 주인에게 일정액을 미포(米布.쌀과 피륙)로 냈기 때문에 납공(納貢)노비로도 불렸다. 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물론 거주 이동의 자유도 있었는데 다만 거주지를 옮기면 주인에게 이를 알릴 의무가 있었다.

그는 외거노비가 서양 중세의 농민과 유사하다고 했던 북한 학자 김석형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외거노비는 서양 중세시대에 농민이 영주와 계약관계를 통해 토지를 경영하던 방식과 비슷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그가 확인한 16세기 고문서에는 상전이 자기 노비에게 소유 전답을 나눠줘 농사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는 “공노비가 가장 느슨한 형태로 조건이 좋았고 사노비 가운데 외거노비가 그다음이었으며 주인집에 사는 사환노비가 가장 살기 나빴다”면서 “외거노비가 대다수였으며 사환노비는 굉장히 숫자가 적었다”고 말했다.

안 실장은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자식도 노비라는 관행에 따라 양반들이 재테크 수단으로 노비를 사들여 양인과 결혼시키면서 노비를 늘렸고, 결국 노비의 숫자가 팽창해 17세기에는 전체 인구의 60%에 달했다”면서 “17~18세기는 도망치는 노비가 급증해 ‘노비 도망의 시대’라고 얘기한다”고 했다.

그는 당시 전문적인 추노꾼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관권을 이용한 추노시스템이 기본으로 작동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추노(推奴)는 노비 추쇄(推刷)를 일컫는데 ‘추(推)’는 조사, 확인한다는 뜻이고 ‘쇄(刷)’는 찾는다는 뜻”이라면서 “흔히 생각하듯이 도망간 노비를 추격해서 잡는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노비가 도망을 가면 주인은 노비가 옮겨간 곳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노비인 호노(戶奴)를 보내 먼저 현황을 파악한 다음 지방 수령의 도움을 받아 장교를 대동해서 노비에게 갔다는 것이다.

국가에서도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을 뒀는데 일정한 시기에만 있던 위원회 성격의 추쇄도감은 공노비의 출생과 이동, 사망 상황을 기록하며 노비의 현황을 파악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안 실장은 “노비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국가는 1801년(순조 원년) 공노비의 주를 이루는 내시노비를 없앴다”면서 “관리하기 힘든 외거노비도 점차 없어졌고 가내사환노비 중심으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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