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여성

  
 
  
 
억센 소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장난스러운 기질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후궁들을 거느리고 마구간으로 갔다. 거기에는 ‘사자총’이라 불리는 사나운 말이 한 마리 있었다. 당 태종은 “후궁들 중 누가 저 사나운 말을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후궁들은 저마다 예쁜 척을 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열 서너 살 남짓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응· 저 아이는 개국공신 ‘무사확’의 딸내미 ‘무미’라는 아이 아닌가·’
“저에게 채찍, 철퇴, 칼 한 자루만 주십시오. 채찍으로 달래보다가 안 되면 철퇴로 머리를 내려치고, 그래도 안 되면 칼로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당 태종은 그만 ‘무미’에게 질리고 말았다. 당태종은 무미가 빼어난 용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미를 멀리했다.

무미(武媚)는 서기 624년 목재상을 하던 거부 ‘무사확’의 딸로 수도 장안에서 태어났다.
무미의 아버지는 당나라 건국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당나라의 신흥귀족으로 편입되며 영광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기가 있는 무미에게 남자 못지않은 교육을 시켰다. 이미 10대 초반에 웬만한 서적은 거의 다 독파했을 정도로 무미의 학문은 남달랐다.

서기 636년 당태종은 무사확의 딸이 용모가 출중하다는 소리를 듣고 무미를 후궁으로 들였다. 그러나 무미는 당태종의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 좀처럼 무미를 품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저 마구간 사건으로 인하여 오만가지 정이 다 떨어졌던 것이다.

사랑은 뜻밖의 곳에

당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에게는 남몰래 짝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대당제국의 세자 신분에 차지하지 못할 여자가 어디 있으랴 마는 이치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아~ 나는 왜 하필 아버님의 후궁을 사랑하는가.’
이치는 남몰래 좋아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후궁 무미였던 것이다.

흔히 일부 야사에서 이치와 무미가 남몰래 난잡한 애정행각을 벌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기록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운명은 이치와 무미를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 같았다.
서기 649년, 당태종이 세상을 뜨면서 무미는 인근 사찰로 들어가 비구니가 됐다.
이치는 슬퍼했다. ‘차라리 예전에는 먼발치에서라도 바라볼 수는 있었는데….’

당태종 서거 1주년. 이미 왕위에 오른 이치(당나라 고종)는 아버지를 기리려 ‘감업사’에 들렀다. 무미가 비구니로 들어간 절이었다.
멀리서 보이는 무미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외로운 듯, 쓸쓸한 듯,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무미의 자태는 고종으로 하여금 인륜이고, 예법이고를 뛰어넘게 했다.

그는 옛 아버지의 후궁으로 아버지가 죽자 비구니로 들어갔던 무미를 데리고 궁으로 돌아왔다. 물론 예법을 따지는 중신들의 반대가 없을 리 만무했다. 무미의 재 입궁에는 남모르는 조력자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당 고종의 ‘황후 왕씨’였다.

호랑이를 들였다

황후 왕씨는 고종의 후첩 소숙비를 무척 싫어했다.
소숙비가 고종의 눈에 들어 동침한 이후로 황후 왕씨는 찬 밥 신세가 돼 있었다.
‘황제께서는 옛 날 선왕의 후궁이었던 무미를 좋아하셨어. 차라리 무미를 궁으로 들여 저 얄미운 소숙비 년을 황제 곁에서 떼어 놓는 게 낳겠다.’
궁으로 들어 온 무미는 황후와 죽이 잘 맞았다. 황후는 무미와 함께 소숙비를 견제했고 꼴도 보기 싫은 소숙비를 내치도록 무미를 이용했다.

무미는 음흉한 계책을 꾸미는 데 천재적인 재주가 있었다. 그는 소숙비를 싫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소숙비에 대한 온갖 안 좋은 소문을 만들어 냈다.
결국 소숙비는 궁궐에서 내쫓기게 된다. 황후 왕씨는 무미가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소숙비를 내쫓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무미에게 큰 상을 내려줘야지….’
그러나 무미의 생각을 달랐다.

‘후후후~ 다음은 네 차례다. 황후의 자리는 내 것이란 말이다.’ 무미의 본색이 서서히 들어나고 있었다.
그사이 무미는 고종의 딸을 낳았다. 고종은 사랑스러운 무미가 낳은 딸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미의 처소로 와서는 딸을 안아주고 가곤했다.

무미는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천륜을 저버리는 짓을 저지른다.
어느 날 황후가 잠깐 왔다 간 다음, 무미는 자기가 낳은 딸을 자기 손으로 목 졸라 죽였다. 이불을 덮어 놓고는 천연덕스럽게 있는데 고종이 무미의 처소로 들렀다. 이불을 걷어 본 고종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아기의 목에 이 손자국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누가 다녀갔느냐·”
무미는 황제에게 고한다. “황후 마마께서 잠시 전 다녀가신 것 말고는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온 자가 없습니다.”
이성을 잃은 고종은 앞뒤 안 가리고 황후를 폐하고 만다. 대충 눈치를 챈 충신들의 읍소도 소용이 없었다.

무미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소숙비와 황후 왕씨를 곤장 백대씩 때리고 양 다리를 잘라 술항아리에 던져 놓고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즐겼다고 한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호랑이를 키운 게야….’ 황후 왕씨는 비통한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숨을 거두었다.

황후에 오르다

왕씨 폐위 6일 후인 654년 10월 19일, 무미는 대당제국의 황후자리에 오른다.
무미가 궁으로 다시 돌아 온 때는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당시 후궁들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미 한물가도 아주 간 나이였던 것이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당태종 이세민 만 좀 특이했다고나 할까.

무미는 정치적으로도 빼어난 정책을 제시했다.
그녀가 황후에 오르자마자 내 놓은 ‘건언 12사’라는 정책은 당대의 재상들이 보아도 감탄했던 것으로, 이 정책은 당나라의 농업, 상업, 조세, 출판물 분야 등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무미는 ‘성씨록’이라는 책을 편찬해 무씨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때부터 고종은 무미를 견제하기 시작한다.
‘음… 황후가 요즘 너무 신출귀몰 해. 나도 모르는 사이 자기의 세력을 엄청 키워 놓았어. 먼저 소숙비와 황후 왕씨에게 한 짓만 보아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

마침내 고종은 대신들과 함께 무미의 폐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이내 무미가 심어 놓은 측근에 의해 발각되고 만다.
‘네 놈이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나를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도 꼼짝할 수 없도록 이미 모든 조치를 취해 놓았지.’

천하를 갖겠다

고종과 무미의 사랑은 여기서 끝났다.
둘 사이에는 4남 2녀의 자식이 있었는데, 이는 고종의 12명 중의 자식 중 절반에 해당한다.
무미는 고종의 장남 ‘무기’에게 내란 음모를 뒤집어 씌워 변방으로 쫓아 내 자살을 강요했다. 이는 자신의 소생을 황태자에 앉히기 위해서였다.

서기 656년, 무미가 낳은 아들 중 장남인 이홍(李弘)이 황태자에 책봉된다. 그러나 끝날 것만 같았던 무미의 욕심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언젠가는 내가 직접 황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릴 테다. 무씨(武氏)의 세상인 셈이지. 후후후’
그녀의 야심은 어떻게 전개될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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